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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영화 ‘암살자(들)’ 사례로 본 팩트와 명예훼손의 법적 경계 | 오종훈 변호사

언론 보도 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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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던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단상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깊은 흉터를 남겼습니다.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북한과 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그 혼란 속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탄환에 맞아 비극적으로 사망한 사건은 사법당국의 현장 검증과 피의자 자백, 법원의 확정판결 및 형 집행에 이르기까지 사법적으로 완결된 명백한 역사적 팩트입니다.


그러나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자(들)’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와 기자의 시선을 빌려 이 명확한 역사적 사실의 판을 뒤흔들고자 시도합니다.


영화는 당시 중앙정보부와 박정희 정권 핵심부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사건을 방조했거나 심지어 자작극을 벌였다는 식의 음모론적 가설을 은밀하게 주입하는데, 이러한 연출은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북한의 대남 공작 논리가 대한민국 상업영화 스크린 위에서 ‘웰메이드’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법적·사회적 논란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상상력이 팩트와 인간적 윤리의 선을 넘어설 때, 그 작품은 예술적 승화가 아닌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음모론으로 전락합니다.


창작의 자유는 끝까지 지켜져야 한다고 믿지만 허구가 사실의 무게를 빌리고, 음모론이 진실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까지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논란이 표현의 자유와 역사적 책임이라는 엄중한 명제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화 ‘암살자(들)’의 한 장면. photo 하이브미디어코프

영화 ‘암살자(들)’의 한 장면. photo 하이브미디어코프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던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단상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깊은 흉터를 남겼다.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북한과 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그 혼란 속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탄환에 맞아 비극적으로 사망한 사건은 사법당국의 현장 검증과 피의자 자백, 법원의 확정판결 및 형 집행에 이르기까지 사법적으로 완결된 명백한 역사적 팩트다.


그러나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자(들)’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형사와 기자의 시선을 빌려 이 명확한 역사적 사실의 판을 뒤흔들고자 시도한다. 영화는 당시 중앙정보부와 박정희 정권 핵심부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사건을 방조했거나 심지어 자작극을 벌였다는 식의 음모론적 가설을 은밀하게 주입한다. 제3의 암살자 존재 가능성이나 경호원의 오발, 정권 차원의 공작설 같은 검증되지 않은 의혹을 ‘열린 결말’이라는 미명 아래 배치함으로써, 마치 국가적 비극의 피해자가 도리어 정국의 전환을 위해 유혈 사태를 유도한 가해자인 것처럼 단정하듯 연출한 것이다. 이러한 연출은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북한의 대남 공작 논리가 대한민국 상업영화 스크린 위에서 ‘웰메이드’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법적·사회적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법적 처벌과 손해배상 공방 


영화 상영 이후 사회적 파장이 일자 법적 처벌과 손해배상을 둘러싼 공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사자명예훼손죄에 명백히 해당한다”며 제작진을 유족에 대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형사법적 관점에서 제작진에게 사자명예훼손죄(형법 제308조)를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형법상 사자명예훼손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의견 표명이나 가설 제시가 아닌 ‘구체적인 허위 사실의 적시’가 있어야 하며, 해당 사실이 허위임을 알면서도 적시했다는 ‘고의성(인식)’이 입증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인물과 구체적 사건은 일부 각색됐다”는 안내 문구를 띄워 픽션(허구)임을 명시한 경우, 법원은 일반 관객의 평균적 인식을 기준으로 이를 역사적 사실의 적시가 아닌 ‘극적 상상력에 기초한 허구’로 판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욱이 형법 제309조 등에 규정된 친고죄 조항에 따라 사자명예훼손죄는 피해자의 유족이 직접 고소해야 수사와 공소제기가 가능하다는 절차적 한계도 존재한다.


실제로 과거 대법원 판례(2010년 선고) 역시 드라마 ‘서울 1945’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등이 친일파를 동원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해결한 것처럼 묘사하여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무죄를 확정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드라마의 특정 장면에 불과하여 구체적인 사실이 적시됐다고 보기 어렵고, 실존 인물에 의한 역사적 사실보다 가상 인물에 의한 허구의 사실이 더 많은 창작물이라는 점이 인정된다”고 판시하며 예술적 표현물에 대한 형사 처벌 기준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손해배상 


그러나 형사상 무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형사 재판이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반면, 민사 재판은 불법행위로 인한 인격권 침해 및 유족의 추모 감정 훼손 여부를 상대적으로 폭넓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26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장남 박지만 EG그룹 회장이 제작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심 재판부는 “사자에 대한 경애와 추모의 정은 유족의 인격적 법익으로 보호되어야 한다”며 제작사에 1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결국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조정으로 종결되었다.


민사 법리상 남편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아내의 죽음을 방조했거나 공작을 벌였다는 식의 암시는 비단 역사적 과오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인륜에 반하는 극단적 모독에 해당할 수 있다. 이는 고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유족이 고인에 대해 가지는 추모의 정(인격적 법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불법행위를 구성할 수 있으며, 유족이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경우 법원에서 인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법적·도덕적 쟁점 속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표현의 자유와 법적 책임 사이의 명확한 경계다. 작품의 제작이나 상영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공권력으로 제재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받아 마땅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만들 자유가 있다면, 그 영화의 무책임함과 왜곡을 비판할 자유 역시 동일하게 존재한다. 창작물이라는 탈을 썼다고 해서 법적·사회적 검증으로부터 성역이 될 수는 없다.


특히 수사의 미비점이나 의혹 제기와 ‘살인 배후설’ 사이에는 거대한 논리적 도약이 존재한다. 수사에 의문이 있다는 것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내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주장이다. 전자를 질문했다고 해서 후자가 입증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의혹과 결론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영화적 연출로 은근슬쩍 메우려 해서는 안 되며,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확신 역시 법적·역사적 증거가 될 수 없다.


아울러 공적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형사상 범죄 사실의 덧씌우기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 권위주의 정권의 정치적 과오는 엄정하게 비판받아야 하지만, 확인된 과오를 비판하는 일과 확인되지 않은 범죄를 덧씌우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법적으로도 명예훼손 판단 시 공공의 이익과 진실성 여부를 따지지만, 근거 없는 범죄 사실의 덧씌우기는 위법성 조각 사유에 해당하기 어렵다.


나아가 진영 논리에 따라 법적·도덕적 잣대를 달리 적용하는 현상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만약 같은 방식의 무책임한 의혹과 음모론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통령과 그 가족을 향했더라도 ‘과감한 예술적 상상력’이라고 옹호하겠는가? 내가 지지하는 편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이고 반대편에 대해서는 예술이라는 식의 고무줄 잣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이 아닌 진영 논리에 불과하다. 진정한 문제 제기라면 자신이 내놓은 가설의 근거를 묻는 냉정한 질문 앞에서도 당당히 팩트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실존 인물과 확정된 현대사를 다루는 창작자에게는 철저한 팩트 확인과 사료에 기반한 검증이라는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 사법적으로 완결된 명확한 증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구실로 자극적인 음모론을 사실처럼 호도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가진 한계를 벗어난 행위다.


상상력이 팩트와 인간적 윤리의 선을 넘어설 때, 그 작품은 예술적 승화가 아닌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음모론으로 전락한다. 창작의 자유는 끝까지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허구가 사실의 무게를 빌리고, 음모론이 진실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까지 동의할 수는 없다. 이번 논란이 표현의 자유와 역사적 책임이라는 엄중한 명제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출처 : 영화 ‘암살자(들)’ 사례로 본 팩트와 명예훼손의 법적 경계 < 사회 < 기사본문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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